사랑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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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기로 하는 결심은 언제나 실패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사람을 향한 결심이든, 지나간 사람을 향한 결심이든 말이다. 사실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결과를 만든다. 적어도 나한테는 항상 그랬다.

이제 연인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됐을 때, 사랑하지 말아야지 했지만 얼씨구… 친구로서 그 애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더 이상 성애의 감정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귈 때보다 더 사랑했다. 친구로 사랑하기도 어려워졌을 때, ‘겨우 사랑이 뭐라고, 걔가 뭐라고.’ 생각하면서 또 다짐했다. 뻔한 결론으로, 나는 지나간 사람으로서 또! 또! 사랑했다. 여전히 그 애의 슬픔이 내 슬픔이었고, 그 애가 행복하다면 다시 못 본다고 하더라도 잇츠 오케이였다. 사랑은 그렇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어느 관계로 하는 사랑까지 내가 견뎌낼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듯이, 미움이 대신할 수도 있는 자리를 자신이 꿰차버렸다. 나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내 사랑은 정말이지 뻔뻔하고, 낯짝도 두껍다. 싸가지도 없는 것 같다. 앞으로 내가 만드는 다양한 관계가 있을 텐데, 그 관계가 어떤 관계이든지 자신이 있을 수 있다며 으름장을 뒀다. 기선제압이 상당했다. 그 때문에 다른 감정들은 한 관계에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도, 사랑이 오면 순순히 그 자리를 비켜줬다.

사랑하는 것은 분명 내 감정임에도, 나는 자주 사랑을 이겨 먹고 싶었다. 이번에는 사랑, 네 뜻에 순순히 넘어가지 않겠다며 기를 세웠다. 그런데 그럴수록 나는 내 자신이 징그러워졌다. 자꾸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를 찾느라, 그 사람의 미운 점들을 나열했다. 근데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그 사람 앞에서는 그의 좋은 점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뒤에서는 열심히 그 사람을 미워하고, 앞에서는 나를 좋아해달라며 애쓰는 모습이란. 음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내가 찾은 미운 점들은 모두 내가 미워하지 않으면 그만인 부분들이었고, 남들이 듣는다면 ‘그래서 그 점이 뭐 어쨌다고.’ 하며 넘어갈 만한 일들이었다. 이를테면 ‘집 앞 편의점 갈 때 슬리퍼를 신어서 밉다.’라는 식이었다. (나는 내가 슬리퍼 신는 것을 싫어한다. 이유는 없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습도 꽤나 짜친다고 생각했지만, 억지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모습보단 덜 짜친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사랑이 안되는 이유를 찾는 것보다, ‘아 사랑이군!’ 하고 인정하는 일이 당연히 더 쉬웠다. 에너지도 훨씬 덜 들었다.

나는 늘 승리하는 사랑에, 그냥 편안하고 안락하게 편승하기로 했다. 사랑하기로 결심해서 상처받는 순간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때마다 더 사랑하면 그만이었다. ‘난 널 사랑한다… 사랑한다…’ 여러 번 읊조렸다. 그러면 다 됐다. 이쯤 되면 나를 사랑에 미친 인간이라고 보겠지만, 부끄럽게도 그게 맞다. 나는 사랑 미치광이이고, 사랑은 승부욕도 강한데다 승리 중독이다. 감정계의 이순신이 따로 없다.

요즘 나는 또 언제 올 지 모르는 사랑을 위해 대청소 중이다. 지금까지의 사랑을 잘 정리해서 마음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감정의 왕좌를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미치광이 나를 위해서. 백전백승 사랑선생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