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9월의 시작에는 언제나 윤종신의 9월을 들어야 한다. 나의 september anthem이랄까.
1. 알렉스는 독일에서 돌아와 인생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며 한탄했다. 그에게 빌린 건반을 돌려주러 그의 오피스로 가 앉아 나눈 대화에서 그는 6년간 캔버라에 살면서 열 번을 넘게 이사를 다녔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의 발단은 건반을 비엔나로 들고 가느냐 마느냐 였다. 나는 어차피 이사 비용은 지원되니 들고가라 했지만 알렉스는 어차피 거기서도 몇 번이고 이사를 다닐 것이 뻔하니 여기서 팔고 가겠다 했다. 우리는 불확실성 속을 걷고 자리를 잡으려하면 어디론가 거처를 옮기고 그러므로 좋은 가구 좋은 악기 따위는 사치품이다. 임시의 삶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그 이후엔 뭐가 기다릴까. 우리는 무엇을 꿈꾸며 임시의 삶을 사나. 알렉스는 이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빵집이나 열고 싶다.
1-2. 빵집 하니까 생각난건데 나는 이제 바게트 장인이다. 우리 동네에서 소노마 포함 내가 바게트 제일 잘 만든다고 자부할 수 있다. 완벽한 레시피가 있다. 어디 노트에 적어둔 게 아니고 내 머릿속에. 그 사실이 참 뿌듯하다.
2, 매들린과 롤플레이를 하면서는 내가 고작 “지금 내 생각이 정리가 안되서 그러는데 나중에 얘기해도 될까?” 라는 문장을 구상해내는 데만 3분 이상이 걸린다는 걸 알았다. 나의 수동성은 엄마의 공격성에 기인할 수 있다고 하는 데서 또 이마를 탁 쳤다. 아 씨발 또?
롤플레이는 정말 무섭지만 나의 나약함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고, 또 막상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도 도움이 된다. 그치만 학생 때 수업 빼먹듯 머리를 요리조리 굴려 늘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아. 요즘 매들린과 연습하는 것은 나의 핵심 믿음(core belief)을 공고히 하는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고 그 사슬을 푸는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롤플레잉. 나 살려.
3.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 이상 과거를 이루는 핵심 요소들을 억압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과거의 다양한 모습을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기술에 녹여 냄으로써 그 과거 전체를 소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 고통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더라도,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주도권을 고통에게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고통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4. 이거 배경화면으로 설정했다.
5. 드럼 선생님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 미친다. 드럼이 재밌어서인지 선생님이 너무 귀여워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치고 싶은 곡 리스트를 제출했다. 새소년, 실리카겔, 혁오의 음악을 들으며 펑키! 디스이스 쏘 씩! 하는 선생님이 귀여워서 설레고, 그거 숨기느라고 쌤 앞에 앉아서 아주 혼자 난리였다. 대체 그녀는 왜 이렇게 귀엽게 웃는가. 논문으로 내야한다. 이렇게 귀여운건 정말 불법이어야 한다. 온마을 여자들 마음에 불을 지핀 죄랄까. (돌겠네) 옛 어른들 말에 사람이 귀여워 보이면 끝이라고 했다. 그니까 난 이제 끝이다. 그리고 대체 나의 드럼 실력은 언제 느는지. 아직 재즈 연주가 하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왜냐, 보사노바 bpm 60으로도 못 치기 때문. 연습이나 하자..
6. 생일 전 날에는 아주 귀여운 생일 파티를 했다. 거의 중노동 급으로 요리했지만 친구들한테 3코스 먹일 수 있어서 좋았고 친구들이 다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웠다. 정말 놀랍게도 가장 쉬운 레시피로 만든 캐슈넛 버섯 스프가 가장 인기가 좋았고 가장 많은 레시피 요청을 받았다. 케일럽은 나는 머쉬룸은 매직 머쉬룸 밖에 안먹는데 이건 진짜 맛있었다, 고 했다. 그걸 최고의 찬사로 치기로 했다. 엘라가 만든 초콜렛 케익은 너무 맛있고도 커서 다들 한 조각씩 가져갔고 내가 (거의 내가 먹으려고) 만든 라스베리 무스케익이 적당한 산도로 초콜릿 케익의 단 맛을 잡아줘서 참 균형이 좋다 했다.
초를 불기 전에 알렉스가 소원 빌어! 해서 급하게 소원을 비는데 머릿 속에 정말 딱 하나 생각나는게 있어 그거 빌었다. 뭔지 적지는 않겠다, 만약 나중에라도 이루어지면 적어야지.
7. 그리고 동생이랑 통화를 가장한 사실은 고양이랑 통화. 우리 애기 보고싶당. 넌 관심도 없겠지만.
8. 9월이 끝나다니. 그래도 감히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9월이었다.
윤종신 9월을 치며 노래를 부르던 때엔 방에 피아노가 있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방엔 드럼 키트가 놓여있다. 임시의 시간을 뒤로 두고 장만해버린 드럼을 언젠가는 애물단지로 여기는 때가 올 지 모르지만 일단은 행복하니 됐다.
시간은 왜 이렇게 속절 없이 빠른지. 아 세월아, 먼저 가지 말고 나도 좀 데려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