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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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친구들에게 쓰는 편지는 막힘이 없는데 왜 너에게 쓰는 편지는 첫 문장을 생각해내는 데에도 30분이 걸리는 걸까. 참 알 수 없는 일이야. 나는 늘상 서럽고 서운하고 눈물이 나. 나는 네가 밉고 너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서운하고 서럽다가도, 너의 동그란 이마와 작은 눈, 그로부터 사선으로 내려오는 코, 반팔 셔츠 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만져지는 너의 어깨나. 너가 내게 웃어주던 모습, 너가 나를 웃게했던 순간들, 우리가 찍었던 동영상으로 발견했던 네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우리가 그저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던 시간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뭐든 다 괜찮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리고 드디어 너와 함께 있게되면 3일이 3분처럼 지나가.

4월 10일

왜 그 때 그 편지는 시작해놓고도 완성하지 못했고 썼음에도 전하지 못했을까.

나는 끊임없이 운다. 밥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로션을 바르면서도. 오늘은 미팅 갈 준비를 하려고 가방을 싸다가 난데없이 울었다. 다섯 시에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왼쪽 심장을 만져 심박수를 재는 것이다. 오늘의 심박수는 75였으니 나쁘지 않았다. 다시 잠에 들고 다시 일어난 일곱 시의 심박수는 89였다. 하루의 어느 때보다 이 때가 가장 괴롭다. 나는 매일 아침을 좆같이 시작한다. 울고싶어도 울음이 나오지 않으니 나는 해가 들어오는 복도를 걸으며 에너지를 내보낸다. 불안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방출해야한다는 책의 한 구절을 생각하면서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노래도 듣지 못한다. 나는 하나의 노래만 잃어버린 것이 아닌 모든 노래를 잃어버렸다. 노래를 들으면 생각에 잠기니 그 대신 라디오를 듣는다. 송은이와 김숙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샤워를 하고 재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버스를 탄다. 머릿속을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끊임없이 채워야만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든 관계에는 흠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관계를 지탱하는건 결국 의지의 문제일 것이다. 사랑만으로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고 그 사이의 틈을 두 사람이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가 관건일 것이다. 바뀌고자하는 의지가 있는지, 이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에의 의지가 있는지. 그러나, 사랑만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없지만 그 변화의 시발점은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27년간 다른 사회에서, 다른 배경 속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우주가 충돌할 때 파편이 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것에 겁먹지 않고 너의 우주와 나의 우주를 적절히 녹여내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내는 것이 사랑이 하는 일이다. 관계에 있어 5-6개월 사이에 가장 많은 연인이 헤어지는 이유도 이 결합의 과정에서 두 사람 중 하나가, 혹은 둘 모두가 달아나버려서 그렇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겁쟁이의 연애는 이제 지겹다. 아니 겁을 먹어도 끝까지 해내는 사랑을 하고싶다.

어제 케일럽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나는 그의 눈을 쳐다보았고 그의 두꺼운 안경 뒤로 가끔씩 붉어지는 그의 두 눈 속에서 내가 발견한건 깊은 슬픔과 좌절 그럼에도 마수미를 떠날 수 없는 그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익숙하게 들린 이유는 단순히 내가 타인의 감정에 잘 이입하는 사람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일방적인 관계.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관계. 한 사람의 방식으로만 돌아가는 관계. 자기도취형 인간과 하는 연애는 얼마나 지치는지. 그럼에도 나는 왜 이 관계를 붙들고 있는가. 나는 나를 갉아먹는 관계 속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가. 내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케일럽은 내게 물었다:

준, 너는 대체 그 관계를 붙들고있는 이유가 뭐야. 너는 정말로 그를 좋아하는거야, 아니면 관계 속에 있는 걸 즐기는거야. Do you just enjoy being in a relationship – being loved, having regular sex, having someone to talk to – or do you really really like him?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아마 그 둘 모두일 것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는 너가 2주동안이나 생각을 했음에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건 이미 끝났다는거 아니야?, 했다. 그리고 또 물었다:

준, 너희 둘이 함께 있을때 그가 어떻게 행동해? What is he like when you guys are together?

그는 다정하고,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웃게해. 같이 있으면 즐거워. 그리고 또 사려깊어.

어떤 방식으로 사려깊은데?

그건 잘 모르겠어.

나는 왜 그가 사려깊다고 말했을까.

마수미와 친하면서도 그녀와 아주 가깝다고는 느끼지 못했던 이유를 케일럽은 정확하게 꾀고 있었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너는 내 맞은편에 앉아 내 이야기를 듣고 있기는 하지만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아. You hear but you don’t listen. 너는 그냥 감정의 창구를 닫아버려, 그러고는 달아나버려. 왜냐하면 너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을 때 그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너의 거지같은 어린시절에 그 능력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야.

나는 듣는 내내 마수미가 케일럽의 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케일럽은 준은 두 시간만에 이해한 말을 너는 4년동안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어, 라고 하며 슬퍼했다. 둘 사이의 신뢰는 어디에 있는걸까. 둘의 관계는 아주 얇은 실로 이어져있는 것 같았다. 그 실은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여 공중에 덩그러니 떠 있는듯 했다. 어쩌면 마수미는 고양이 때문에 케일럽을 떠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다섯 시에 눈을 떠 다시 잠에 들고 여섯 시까지 자는 동안 꾼 꿈에서는 마수미가 나왔다. 우리 둘은 하와이로 가는 길이었는데, 비행기는 순항하다가 수풀 어딘가에 착륙했고, 어디선가 직원이 나타나 승객들에게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대체 무슨 통행료인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나와 마수미는 비행기에서 내려 신식의 공항 건물로 들어가 통행료를 지불하고 비행기에 다시 올랐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가는 국경을 넘듯 제복을 입은 직원들과 노란 선 위에 걸쳐 서있는 비행기를 보면서 요상하다 하는 생각을 했다.

여섯 시에 눈을 떠 다시 잠에 들고 일곱 시에 다시 눈을 뜨기까지는 캔버라에서 구직을 하는 꿈을 꾸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원한 100개가 넘는 회사 중 캔버라의 회사에만 붙은 꿈이었다. 꿈에서 나는 시드니에 갈 수 없었다. 씨발, 씨발 하면서 시드니에서는 왜 일을 할 수 없을까 오열했다. 시드니에 갈 수 없으면 그와 함께 할 수 없고, 그 사실에 가슴이 찢어졌고, 눈을 떠서는 등줄기에도 허벅지 뒤에도 짙은 땀이 서려있었고 얼굴을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