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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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어렵지만 이제는 한국어로 생각을 거치지 않고 원하는 것을 말하고 쓸 수 있을 정도, 따로 시험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시험 성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유창하다. 기숙사에 살면서는 세계 이곳 저곳의 억양을 듣고 그를 양분삼아 듣기 실력을 키운다. 원체 발음과 억양을 쉽게 캐치하는 편이라 고작 호주에 1년 살아놓고 호주인처럼 말을 한다. 유럽 여행을 가서는 호주에서 왔냐는 소리를 자주 들었고 굳이 부정할 필요는 못느껴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서 다녔다. 요즘엔 호주 억양보다 인도 억양의 인풋이 더 많아 가끔 나도 모르게 말하다 인도 억양이 나오고 그럴 때마다 정말 웃기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호주 억양, 약간의 미국 억양, 그리고 가끔 흥분하면 나오는 아주 약간의 한국 억양은 잃고 싶지 않아하면서도 호주, 미국, 한국, 인도 억양이 모두 섞인 알 수 없는 억양을 가진다면 그것도 또한 멋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중국어는 대학교에 들어가 처음 배웠으면서도 1학년 1학기 4주차쯤이 되니 교양중국어초급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넌 참 발음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언어 배우기를 원래 좋아하는데 거기에 전공까지 했으면서도 중국어에 정을 붙이지 못했던 건 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관심은 졸업을 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없고 앞으로 생길 것 같지도 않다. 중국어를 하는 여자친구가 생기면 달라질까. 그럼에도 나름 전공을 했다고 중국애들이 대화하는걸 듣거나 중국어로 쓰인 책을 봐도 절반쯤은 이해를 한다.

영어 다음으로 배웠던 언어가 불어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나 중학교 1학년이었나, 영어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셔틀버스 안에서 윤지선이랑 프랑스어를 배우고싶단 얘기를 하고는 다음날에 집 앞 영풍문고에 가서 프랑스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샀다. 그렇게 내가 뭘 배우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한 달 쯤 독학을 하다가 그 책을 산 걸 엄마한테 들켜 크게 혼이 난 이후로는 배우려는 흥미도 잃었다. 고등학교 때 제 2외국어 수업을 선택할 때 프랑스어를 다시 배웠다. 그 때 한 학년에 한 350명쯤 있었나. 그 중 프랑스어를 선택한 애들은 2-30명 남짓이었고 그 중엔 프랑스에서 살다온 애도 두 명 있었지만 내 프랑스어 중간기말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이었다. 심지어 첫 수능에선 제 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택하고는 2등급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왜 불문과를 안갔을까 싶다. 아마 나는 불문과에 가고싶었을 것이다. 엄마는 불어는 죽은 언어라며 중문과가 취업도 훨씬 잘 되니 중문과에 가라고 설득했다. 결국 전공으로 배운 중국어는 써먹지도 않는 인간이 되어버렸지만. 불문과를 갔으면 분명 대학원에 갔을거다. 불문학이든 미술사든 뭐든.

대학교에 와서는 불어를 놓는게 아쉬워 교양불어초급 수업을 들었고 교환학생을 가서도 전공 수업은 안듣고 French3, French4를 들었다. 우리과 교수님이랑은 안친해도 불문과 조주은 선생님, 박성혜 선생님과는 친분을 쌓았다. 이쯤 되면 그냥 불어불문으로 전과라도 할걸 그랬네. 사실은 한 번도 불어를 놓은적이 없으면서도 불어 잘 못한다는 사실이 늘 아쉬워 듀오링고를 하고 델프 준비를 하고(시험은 안봤다) 프랑스 영화를 자막 없이 보다가 대충 문맥을 알아들으면 안도하고 그러다가 답답해져 자막을 켤 때도 무슨 자존심이 남아있다고 한국어가 아닌 영어 자막을 켰었다. 2019년 여름 프랑스에 한 2주정도 있으면서는 불어로만 말을 하며 살았다. 복문은 하나도 없는 아주 쉬운 불어였지만 그래도 영어는 거의 쓰지 않으면서 살았다. 그럼에도 누가 어떤 언어를 할 줄 아냐 물으면 불어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쩐지 실력은 늘 부족하다 생각해 말을 하면서도 민망해했다.

이 긴 얘기를 왜 갑자기 했느냐 하면 오늘 정말정말 오랜만에 프랑스어 수업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였나 민경 작가님이 불어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아주아주 급하게 듣고 거의 막차 타듯 수업을 신청해서 오늘 첫 수업을 들었는데 기억나는 단어야 13, ca n’a rien a voir, cochon 등 열개 남짓이 전부이지만 그보다 훨씬 기억에 남는건 말을 할 때 절대 영어를 매개로 생각을 하면 안되다는 것. 내가 버릇처럼 하고 있었던 일이라 뜨끔했지만 이 방법의 한계를 나도 이미 알고있었기 때문에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 그럼에도 자꾸 영어가 들리는걸 어째…

공부도 많고 시험도 세개나 있는데 불어 공부할 시간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언어를 배운다는 감각을 잊은지가 너무 오래돼서 신청했는데 오티를 들으면서도 너무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2주간 잘듣고 잘 말해봐야지. 그러고도 해볼만 하다 하면 델프 준비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