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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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곁에 끼고 읽었다. 모임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책을 소개하며 ‘문체가 되게 시같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그런지 책장이 잘 안넘어가더라구요. 몇 장 보고 덮어두고 다음에 다시 집어들고 이렇게 읽었어요’라고 말하니 이미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도 책이 잘 안넘어가더라 하는 얘기를 많이 했다. 말이 꿀떡꿀떡 넘어가는 책들이 있다. 작가의 문체가 재미있거나 이미 관심있는 주제를 다루는 책이라면 그렇다. 그런 책들은 휴양지에 가져가서 몇 번이고 읽고싶다. 익숙하고 보장된 웃음을 약속하는 책들은 부담이 없다.

예약 주문을 할 때부터 이건 하와이 가서 읽고싶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하와이에 가서 읽고 싶다. 그치만 이 책이 가벼우냐 즐거우냐 하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 책장이 술렁술렁 넘어가지도 않고 오히려 한 번에 많이 읽으면 과부하가 걸린다. 몇 문단 되지 않는 짧은 꼭지에서 마구마구 생각이 솟는다. 책을 읽다가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였다. 사진첩을 아주 많이 뒤적였고 인스타그램의 스토리 보관함도 여러번 들락날락했고 좋아했던 사람의 블로그도 한 번 방문했다. 어떤 날씨가 좋은 날엔 운이 좋게도 수업이 없어서 교외로 나가 책을 펼쳐들었는데 읽다가 한 단락에 꽂혀 생각을 하다가 웃다가 현타가 와서 책을 집어넣었다.

좋은 글은 만나게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책 속 많은 글들은 나를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만나게 했다. 그 누군가는 보통 과거의 나였고 무언가는 휴대폰 속 사진첩, 이전 날의 생각들, 새롭게 꽂혀 몇 시간을 반복재생한 노래같은 것들이었다. 지나간 것들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진부하다고 늘 생각했다. 나는 과거에 얽매여있다고, 지금을 봐야하고 앞을 봐야하는데 자꾸 뒤만 돌아본다며 스스로를 타박하고 또 스스로에게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정말 살게 하는건 삶이 좋았던 시절이 있었지 할 수 있게 해주었던 과거의 나. 정말 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돌아갈 수 있는 이 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이 있다는 사실. 반성이든 반추이든 과거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교훈을 얻고 미래의 내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미리 대비해놓는 것. 그로써 상상뿐이더라도 내일은 좀 낫지 않을까 하는 희망.

이번 겨울엔 날씨가 더운 휴양지에 가야지. 따뜻한 볕 아래서 책의 한 꼭지를 읽다가 또 삼천포로 빠져 생각에 잠기다 낮잠을 한 숨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