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능성은 결국 내가 증명해내야 하는 일이다. 성공한 경험이 쌓여야 한다. 효리 언니가 했던 말의 핵심도 결국 그것일테다.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는 일이 많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결국 성취의 경험을 쌓으라는 말일 것이다.
내가 왜 군인팀을 사랑하는가 생각해보면 그들에겐 지금의 나에게는 없는 총기 비슷한게 있어서 그럴 것이다. 뚜렷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맑은 눈과 안광이 보여서.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마음이 온다 결국 신체를 건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요새는 한국에 가고싶어지는 마음이 많이 든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치만 또 가면 떠나고 싶겠지. 어디에도 정처를 둘 수 없는게 내 운명인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든 생각에는, 갔던 도시를 가고 또 가고 해서 그곳에 익숙해지려고 하는 욕망은 어쩌면 나에게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 있었다. 코자 애들하고 술 마시다가 나온 얘기였는데 캐시는 현준에게 한국과 호주 중에서 어디가 더 home 같으냐고 물었고 현준은 더 이상 한국이 home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했다. 캐시가 같은 질문을 나에게 했을 때 나는 한국도 호주도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그 곳에 속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같은 느낌을 받고 호주에서 난 그냥 이방인이다. 그 중 내가 속할 수 있는 작은 유토피아는 3년 전 몸글에서부터 파생된 작은 글쓰기 글쓰기 소모임같은 여성 커뮤니티가 전부인데 호주에서 그걸 꾸릴 수 있을까.
내 소망은, 책 읽기를 좋아하는 한국 여자와 호주에서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내가 무얼 원하는지 몰랐던 과거와 비교해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지금은 확실히 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이상임을. 사랑에 언어의 장벽은 없다 해도 내가 원하는건 모어로 하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어로만 할 수 있는 교감, 한국 여성이기 때문에 공유할 수 있는 어떤 문화적 감수성. 가령 정세랑의 신간을 읽으면서 이거 눈물나게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호주 친구에게 어떤 책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여성 소설을 좋아한다 하면 그 맥락을 주구장창 설명해야 하지만 한국 여성에게는 많은 말을 생략하고도 아, 그런 류의 글을 좋아하시는군요, 당신의 사상은 이렇군요 하는 것들을 파악할 수 있다.
모국어로 말하는 기쁨. 늘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은 난 한국어로 말하면 몇 배는 더 똑똑하다는 것, osmosis와 diffusion의 차이는 몰라도 삼투와 확산의 차이는 안다는 것. 정제된 단어로 잘 다듬어서 원하는 바를 똑똑하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영어에서는 도무지 없다. 그게 아직 없는 것인지 내가 원어민이 아니기에 앞으로도 없을 것인지는 모르겠다.
주절주절 썼지만 결론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