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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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어제는 뭐가 그렇게 서러웠냐면, 사실 그 이유를 콕 집어 말하기는 아직도 어렵다만, 그냥 인생이 참 좆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기 싫은거 하고 살아야 하나, 뭘 그리 아등바등대며 살아야 하나 하는. 그 때 라이프 프라블럼에 대해서 얘기해보는거 어때, 하는 잡소리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김태영이 늘 말하는 것처럼 푸하하 웃고 말 일이지 슬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슬픔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 댈 걸 알면서도 시작했다. 늘 그렇다. 기댈만한 사람과 있기만 하면 한숨부터 푹 나오는 것이 아주 몹쓸 버릇이다. 늘 마음 속으로만 하던 생각이 가끔 어떤 사람들과 있으면 입밖으로 나와버리곤 한다.

말이 나온 김에 그냥 다 쏟아내버리자 했던 것이 문제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었다면 김태영이 말하는 것처럼 그냥 깔깔 웃고 아우 별 일 아니야, 하고 말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기세가 부족한 탓이겠지. 아무튼 제이콥에게 인생의 리셋버튼이 있다면 눌러버리고 싶다고 했다. 사실이다. 출생부터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겠다. 내가 지금 모습의 내가 아닐 것을 알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사람은 늘 오고 가는 법이니까. 결국에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다는 것은 내가 무진장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겪고 있는 일들, 내가 곁에 두는 사람들, 내가 가진 것들. 그 목록을 쭉 나열해 pros and cons 리스트에 집어넣는다면 아무래도 오른쪽 칸만 차고 넘칠 것이다.

하기 싫은걸 하고 살아야 하는게 가장 분하다. 이깟 비자가 뭐라고 돈 낭비에 시간 낭비에 정신건강도 낭비해야하나. 나 진짜 여기 살고 싶나? 여기가 그렇게 좋은가? 여기서 버티는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여기서 석사 공부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혜린을 보고는 왜 돌아갔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근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 비자 받으려고 전전 긍긍하는거 지겹다. 외국인이라서 하고 싶은 일 못하는 것도 지겹다. 한국 책 읽고싶고 예지 보고싶고 퇴근하고 김태영이랑 수다떨고싶다. 내가 버티는 이유는, 다시한번 pros and cons 목록으로 돌아가서, 한국에서 일하는게 죽도록 싫기 때문이다. 김태영이랑 카페에서 수다떠는게 +1 이라면 한국에서 일하는게 -100이라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순적인 점은, 여기서에서도 그렇게 보람찬 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럴 거면 걍 한국에 가서 야근 지옥에서 갈리더라도 하고싶은 일을 하는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쨌든 결정을 내려야 하니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고 그 생각 때문에 뒷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걍 온몸이 다 아프다.

아무튼 서러웠던 어젯밤으로 돌아가서, 나는 인생에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은데 얘는 인생에서 재밌는 것도 많고 하고싶은 것도 많고 참 즐거워 보여서 더 질투나고 짜증나고 그랬던 것 같다. 얘도 자기 나름대로 위로를 하려고 했던 것 같으나 잘 되지 않았고… 나는 불 꺼진 방 침대 위에서 쿨쿨 자는 남자친구 옆에 누워 서럽게 울다가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김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웃긴 것이 김태영 목소리를 듣자마자 존나 웃음이 나왔다. 김태영은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야! 전제부터가 틀렸네! 했다. 또 뭔 소린가 들어봤더니 니 남자친구랑 너를 비교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되지. 넌 니 인생을 살아! 라고 했는데 야 그건 나도 알지, 나도 그게 문제인걸 아는데 자꾸 비교를 하게 되는걸 어떡해. 그랬더니 걔가 가진 특권을 너는 가지지 못했으니 너가 더 힘든게 당연하다고. 비교를 할거면 자기랑 비교하라고. 어디 한국에 20년 살면서 좋아하는거 찾기가 그렇게 쉽냐고. 네모난 틀 안에 맞춰 사는 사회에서 자기 취향 찾기 쉽지 않다고, 너 그정도면 잘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런 비교하는 마음이 들 땐 그냥 흥 너 뭐가 그렇게 잘났어? 하고 말으라고 했다. 인생은 기세라고. 하고싶은게 있다면 그냥 하고싶은거 다 하고 살라고. 너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살으라고, 너 잘난거 맞다고.

그런 말들을 듣고싶었다, 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시선으로부터>의 심시선의 말처럼 결혼을 해도 대화는 여자들이랑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여차 저차 해도 역시 대화는 친구랑 하는 것이 맞다. 웃기게도 또 김태영은 너 이런거 다 알고있는데도 그 순간에는 생각이 안났어? 했고 나는 그냥 응, 다 알면서도 제 3자가 나한테 말해줬으면 좋겠다 싶었어, 했더니 김태영은 다시, 너 또 이거 한국말로 듣고싶었지? 했다. 근데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상담도 좋고 제이콥이랑 이야기하는 거도 좋지만 김태영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그리고 한국말로 너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게 강력한 처방전처럼 느껴졌다.

라고 8월 10일에 적은걸 이제야 올리게 됨